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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려 거란 전쟁 강조의 정변

by 아몽지크 2023.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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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거란 전쟁은 크게 세 차례로 볼 수 있습니다 그중 강조의 정변과 관련된 것은 제2차 고려 거란 전쟁입니다 거란은 고려에서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고려 왕으로 옹립한 사건에 대하여 책임을 묻겠다는 명분으로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그러면 정변은 왜 일어났는지 그리고 강조는 누구인지, 왜 정변을 일으켰는지 자세히 알아보고자 합니다

 

강조는 누구인가

강조는 황해도 신천 강씨 집안사람으로 강태주의 아들로 강태주는 태조 왕건의 먼 외척의 후손이지만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습니다 출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이유로는 아마 정변을 일으키고 역적이 된 원인일 것입니다  

강조가 태어날 무렵 그의 가문 일족 중에서 태조 왕건의 22번째 부인인 신주원부인이 있는데, 강조는 신주원부인의 친정 가문의 일족이었습니다

강조는 983년 고려 성종의 하급 궁료로 천거되어 말단 관리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991년 무관으로 발탁되어 본격적으로 관직에 출사 하였습니다

 

강조의 정변 발단

997년 고려 성종이 후계 없이 죽고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목종의 어머니인 천추태후가 섭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천추태후는 성종 때 유배되었던 자신의 정인 김치양을 유배에서 풀어주어 관직에 중용 고려 재정 및 인사까지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김치양은 득의양양하게 천추태후의 권세를 등에 업고 마음대로 정치를 하였습니다

1003년에는 천추태후와 김치양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게 됩니다 김치양은 이 기세로 자신과 천추태후 사이에 태어난 아이를 목종의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고려 목종도 당시 많은 문제가 있었다고 고려역사를 기록한 고려사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그 내용 살펴보면 목종이 유행간이라는 미남을 끌어들여 동성애 관계를 맺고 목종은 유행간을 매우 신임하여 교지를 내릴 때마다 유행간에게 먼저 물어본 다음에 시행할 정도로 총애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명이 더 있는데, 유충정이라는 발해인도 별다른 능력이 없었는데도 목종으로부터 총애와 신임을 받았다고 합니다 목종은 유행간과 유충정에게 수방(왕의 음식이나 연회를 담당하는 부서)의 관리들을 다스리게 했는데 그 둘이 출입할 때 수행원들을 대동하는 것이 왕처럼 분수에 넘쳤다고 한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전횡과 실정, 목종과 유행간, 유충정의 전횡과 실정 이런 전횡과 실정들이 모이고 쌓여 국가 기강은 어지러웠고, 고려 관리들 사이에서는 더욱더 큰 불만이 계속 쌓일 뿐이었습니다

이 당시 강조는 여러 관직을 거쳐 서북면 도순검사로 고려 북방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1009년(목종 12년) 김치양이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와 사통해 낳은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고 난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목종은 김치양의 계획을 사전에 알고 대량원군(현종)을 후계자로 삼고, 강조를 불러들여 개경 궁궐을 수비하고 자신을 호위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강조의 정변

강조는 왕명을 듣고 소규모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오던 중 동주 용천역에서 위종정과 최창을 만났는데 이 둘은 현재 목종은 매우 위독하고 개경으로 오라는 왕명은 사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강한 군사력을 가진 강조가 두려워 강조를 유인하여 제거하려고 사칭한 거짓 왕명이라고 거짓말을 하여 강조는 자신의 본영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때 강조의 아버지가 왕이 이미 죽었으며, 간흉들이 권세를 휘두르니 개경으로 군사를 끌고 와서 국난을 바로잡으라는 편지를 강조에게 보냅니다 강조는 아버지의 편지를 읽고 나서 목종이 죽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강조는 즉시 군사 5천을 거느리고 개경으로 오던 도중 왕이 죽지 않았다는 보고를 듣고 군사 진군을 멈추었습니다 이때 여러 장수들이 이제 와서 주저할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자 다시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당시 강조는 목종을 폐하고 새로운 왕을 세우기로 결심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개경으로 진입한 강조는 궁궐을 장악하고 목종을 만나 김치양 일파와 유행간 일파의 전횡과 실정이 국난을 불러온 것이라 지적하며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왕으로 옹립하였습니다

이후 군사를 보내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을 비롯한 7명은 처형시키고, 이주정을 포함한 30여 명은 먼 섬으로 유배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천추태후와 목종을 충주로 보냈는데 도중 목종을 시해했습니다

강조는 이후 고려의 최고 실권자가 되었습니다

 

드라마 영상 참조

 

강조의 마지막

1010년 11월 거란 성종은 강조의 정변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이것이 제2차 고려 거란 전쟁입니다

이때 강조는 고려군 30만을 이끌고 통주에서 거란군과 맞서 싸웠는데 여러 번 전투에서 쉽게 승리하였습니다

지속적인 작은 승리에 자만하던 강조는 어이없는 경계 실패와 거란군의 기습에 포로로 잡혔으며 고려군은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거란 성종은 포로로 잡은 강조에게 자신의 신하가 되어달라고 권유했으나 강조는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는가라고 말하면서 단호하게 끝까지 거절하고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강조의 정변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고려사에 기록된 정변이 시작된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점이 많이 남았습니다 

고려사는 조선시대 후대 유학자들에 의하여 작성된 기록이라는 점에서 당시 고려가 불교국가였던 상황과 달리 훨씬 개방된 사회였다는 점은 고민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강조가 정변을 일으켰고, 고려와 거란이 전쟁을 치렀고, 강조가 포로로 잡혀 처형된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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