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고대 국가 옥저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합니다 먼저 옥저의 위치에 대하여 알아보고, 다음으로 문화와 생활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고대 국가 옥저가 어떤 국가였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반도 고대 국가 옥저의 위치와 영향력


한반도 고대 국가 옥저는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 285년까지 존속한 국가로서 위치는 함경남도 함흥평야를 중심으로 영흥 이북에서 두만강 유역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던 부족 공동체 집단이었습니다
북쪽으로 읍루, 부여에 접하였으며 남쪽으로 동예에 접하고 있었습니다 옥저는 보통 동옥저라고 불리었으며, 남옥저 북옥저로 다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남옥저는 함흥 일대에 있었고 남으로는 영흥 부근에서 동예와 경계를 맞대고 있었습니다 북옥저는 길림 연변에서 두만강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으로 큰 바다를 접하였다고 하며 그 지형은 동북은 좁고, 서남은 길어서 천 리나 된다고 하였습니다 북쪽에는 부여와 읍루, 남쪽에는 예맥에 접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옥저는 항상 큰 나라들 사이에 존속해 왔습니다 기원전 2세기경 처음에는 위만조선에 예속되어 있었고, 서기 2세기말 중국 한나라에 의해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나라는 한사군을 만들었는데 옥저가 위치한 곳은 현도군으로 요동에서 개마고원을 넘어 동해안까지 이르는 동서를 연결하는 공도상에서 동쪽 끝에 있는 국가가 옥저였습니다
기원전 75년 고구려에 의해 현도군이 요동으로 쫓겨 감에 따라 옥저는 현도군에서 분리되어 동예와 함께 낙랑군 동부도위에 귀속되었습니다
서기 30년 낙랑군 동부도위가 폐지됨에 따라 낙랑군 예하의 현이 되었다가 고구려의 세력이 강해지자 고구려 지배하에 귀속되었습니다
옥저는 서기 244년 위나라 관구검이 이끄는 위의 군대가 고구려 동천왕을 쫓아 옥저까지 진격해 그곳의 읍락들을 침략 및 약탈하자 멸망할 수 도있는 위기도 겪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격으로 위나라가 격퇴되었고, 옥저는 국가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의 보호아래 있다가 서기 285년부터 고구려의 직접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북옥저 지역에 남은 세력들이 그곳에서 동부여를 세웠다고 하는데, 동부여는 서기 410년 광개토대와의 원정으로 완전히 멸망하였습니다
옥저의 사회 문화와 생활상
옥저 지역에서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해 왔고,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동북지역 선사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했습니다
기원전 4세기 ~ 기원전 3세기에 고조선이 요동지역에서 대동강 유역으로 중심지를 옮겨 남옥저 지역은 고조선의 세형동검 문화와 접촉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옥저에서는 지역별로 대소 규모의 정치체들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이들이 지속적으로 성잘 발전하여 옥저의 부락 및 읍락을 구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옥저는 여러 부락들이 하나로 통일된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하였습니다 각 부락 읍락의 족장들이 자치적으로 각자 일을 운영하였습니다
옥저가 성장하지 못한 이유로는 위만조선, 한군현, 고구려로 이어지는 외부의 큰 세력에 의한 지배와 수탈로 통일된 성장과 발전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삼국지 동이전에 동옥저는 인구가 5천 여호였다고 합니다 이는 남옥저의 규모를 말하는 것으로 남북옥저 전체의 인구를 합한 것은 아닙니다 이 정도의 인구 규모는 삼한 각 소국의 평균 호수인 2~3천 호보다 크며, 낙랑군 또는 동예 각 현의 평균치인 3천여 호보다도 큰 규모였다고 합니다
5천여 호의 주민들은 여러 개의 읍락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합니다 삼한지역을 참고로 읍락의 평균 호수를 5백여 호로 잡으면 적어도 옥저에는 10여 개의 읍락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옥저의 주된 생산기반은 농업이었습니다 지형이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하고 있어서 해안지역에서는 해산물이 풍부하였고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이 잘 자랐다고 합니다
북옥저 지역도 일찍부터 잡곡농사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함경북도 무산 호곡동의 청동기시대 유적에서는 탄화된 기장과 수수가 발견되었으며, 북옥저의 주거지로 알려진 흑룡강성에서도 탄화된 조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옥저의 각 부락에서는 소와 말이 적어서 옥저인 들은 주로 보병전투에 능숙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의복은 고구려와 비슷했다고 합니다
옥저의 풍속으로 민며느리제도가 있는데, 이는 소녀가 10세가 되면 양가에서 서로 혼인할 것을 약속한 뒤 소녀는 남자집에 보내졌습니다 소녀가 장성해 처녀가 되면 다시 본가로 돌려보내고 처녀집에서는 돈을 요구하고 그것이 지불된 뒤에야 처녀는 신랑집으로 가게 되는 일종의 매매혼적인 성격의 제도였습니다
옥저의 장례풍속은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풀이나 흙 등으로 덮어 임시로 가매장했다가 시체가 썩은 뒤, 뼈만 추려 목곽에 넣었다고 합니다 목곽은 길이가 10장이 되며, 한쪽에 입구를 만들어 뼈를 넣을 수 있게 하였는데 일종의 복장 또는 이차장의 풍속이라고 합니다
한집안 사람은 모두 동일한 목곽을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죽은 사람의 모습의 나무 인형을 만들어 목곽 옆에 두어 그 숫자로서 목곽 내의 죽은 사람의 수를 헤아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릇에 쌀을 넣어 목곽 입구 쪽에 매달아 놓았다고 합니다
옥저는 당시 고구려나 부여에서 널리 행하여진 혼인풍속인 형사취수제도 옥저에서 행하여졌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혼인과 장례풍속은 당시 옥저 사회에서 친족집단 간에 공동체적 결속력이 아주 강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북옥저 지역인 중국 흑룡강성 동녕현에서는 북옥저인들의 주거생활을 보여주는 유적들이 다수 발굴 되었는데, 대표적인 유적인 주저지는 장방형 반수혈실 주거지로 주춧돌을 사용하여 기둥을 세웠고 실내 서벽 남쪽 모서리에는 부뚜막과 아궁이가 있고 서벽에서 북벽으로 벽을 따라 난방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북옥저인들의 고산 취락지가 있는데 이는 북옥저인들이 읍루인들이 배를 타고 와서 노략질을 하는 것이 두려워 여름철에는 산속 바위굴에서 지내고, 뱃길이 통하지 않는 겨울철이 되어서야 마을에 내려와 살았다고 하는 기록이 중국 삼국지에 기록되어 남아 있습니다 아쉽게도 아직 남옥저 함경도 지역에서는 북옥저와 비슷한 주거지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옥저에 대하여 알아보았는데 옥저는 대군장이 없었고 각 부족 읍락 자체적으로 유지되었으며, 연맹 단계의 국가로는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옥저가 남긴 여러 가지 역사적 유물들은 남아 그 당시 큰 강대국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정체성을 유지한 채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오늘날 복잡하고 혼란한 세계에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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