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한반도 역사의 고구려 3부

by 아몽지크 2024. 1. 7.
반응형

한반도 역사의 고구려에 대하여 1부, 2부에 이어서 한반도 5세기 6세기 고구려 대외 관계와 당시 한반도 고구려 백제 신라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합니다

 

 

고구려 5세기 ~ 6세기 대외관계

고구려는 5세기 ~ 6세기 영토확장 정책을 적극적으로 진행해 나가는 한편 국제정세의 변화에도 민감하게 대처해 나갔습니다 중국 쪽과의 군사적 대결과 대립을 지양하고 각국의 세력관계 변화에 따라 다중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200여 년간 장기적인 평화관계가 지속되었습니다

반면 5세기를 전후해 고구려와 백제 신라와의 관계는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추진하자 백제와 신라는 내외적인 세력관계의 변동에 따라 서로 연한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4세기말에서 5세기 중엽까지는 신라를 예속화한 고구려와 백제의 대결시기이고,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엽까지는 고구려가 남진을 적극화함에 따라 백제와 신라가 연합하여 고구려와 대결하는 상황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고구려와 중국 남북조와의 관계

중국은 당시 북방의 강자로 북위가 등장함으로써 중국은 오랫동안 지속되던 5호 16국 시대라는 혼란기를 끝내고 남북조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남조의 송과 북조의 북위가 서로 중국의 통일을 지향하며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와 함께 그 주변에 있는 국가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국가의 존립방식을 고민해야 했습니다 광개토대왕시기 급속한 국력의 향상을 이룩한 고구려도 새로운 구제질서 환경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면서 동아시아 질서의 한 축으로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한반도 내 삼국의 대외관계도 이러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규정을 받아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후연과 치열한 투쟁 끝에 요동지방을 확보한 고구려는 북연을 사이에 두고 북위와 대립하였습니다 고구려 장수왕 24년(436년) 북연왕 풍홍의 고구려 망명사건은 새로이 국경을 접하게 된 고구려와 북위 간의 갈등을 야기시켰습니다 고구려는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풍홍을 살해하였습니다 하지만, 북위를 견제하기 위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던 송이 개입하였고 고구려와 송 북위 간에는 긴장관계가 조성되었습니다 풍홍의 고구려 망명과 살해는 고구려의 북위 및 송에 대한 다중적인 외교정책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북위는 계속 세력을 확대하여 439년 북량을 멸망시켰고, 446년에는 서방의 토욕혼을 공략하였습니다 북위의 팽창은 인접해 있는 고구려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습니다 

장수왕 15년(427년) 평양천도 이후 남진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나가던 고구려로서는 무엇보다도 서쪽 국경 안정이 시급한 문제였습니다 이에 고구려는 북위 주변에 있는 국가들과의 외교 교섭을 통하여 북위를 견제하고자 하였습니다 고구려는 북방에서 북위와 강력하게 대립하고 있던 유연과의 교섭을 통하여 북위를 견제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남조인 송과도 연결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유연과 송도 또한 북위를 적대국가로 인식하였던 상황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고구려가 풍홍사건 이후 약 20여 년간이나 북위에 사절을 파견하지 않았던 사실에서 당시 고구려의 대북위관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는 장수왕 50년 북위에 사절을 파견함으로써 한때 단절되었던 양국관계를 개선하고자 하였습니다 당시 고구려가 북위와의 관계개선을 서둘렀던 배경 중에는 남쪽에서 백제 신라의 연합이 가시화되어 고구려를 위협하는 상황에까지 이른 데 있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에 대해 북위도 당시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던 송, 유연 등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고구려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이후 북위와 고구려 양국 관계는 급속히 개선되었고 고구려는 매년 사신을 파견하다시피 하며 북위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당시의 양국관계는 조공과 책봉관계로 이해할 수가 있는데 양국관계를 시사해 주는 몇 가지 사례를 알아보면, 북위는 그 주변국 가운데 고구려왕의 지위를 높게 책봉하였으며, 또한 외국사절에 대한 연회에서의 입장순서와 외교사절에게 배정한 숙소에서 고구려 사신을 남조 사신에 이어 제2위로 대우하였습니다

북위에서 고구려에 파견한 사절의 횟수만 하더라도 북위의 대외 사신 파견국 가운데 남조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숫자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북위가 고구려를 얼마나 중요한 상대자로 여기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양국관계가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장수왕 54년(446년)에는 북위의 청혼을 고구려가 거절함으로써 두나라의 관계는 냉각되었습니다 이어 북위에 왔던 백제 사절의 고구려영토 통과 문제와 고구려 남제의 외교문제를 놓고서도 갈등이 있었습니다 한편 북방에서 세력을 확대하며 고구려와 마찰을 일으켰던 물길이 북위에 접근하자 고구려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고구려는 물길이 북위와 연결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하여 유연과 합세하여 지두우를 분할 점령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이렇듯 양국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조공 책봉관계를 유지하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지만 서로를 잠재적인 적대세력으로 여겨 경계와 견제를 계속하였던 것입니다

고구려는 북위와의 관계개선 이후에도 남조 및 유연과의 우호관계를 지속시켜 나갔습니다 백제가 북위에 국서를 보내어 고구려의 이와 같은 다중외교를 비난하고 청병의 구실로 삼고자 했던 사실에서 당시 고구려 외교의 복합성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고구려는 중국 각국과의 다중적인 외교관계를 통하여 고구려 영토 서쪽에서의 안정을 확보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동북아 질서의 한 축으로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확립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북위 및 몽고고원 세력의 영향력을 배제하면서 그 직할 영역의 외곽에 일부 거란족과 말갈족의 부족들을 예속시켰고, 실위에 철을 공급해 주는 등 내몽고 동북부지역에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었습니다 또한 부여를 지배하고 신라의 내정에 깊숙이 간여할 뿐만 아니라 백제를 압박하는 등 동북아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영토 서쪽의 안정을 바탕으로 남진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백제의 수도인 한성의 함락과 중부 내륙지방으로의 진출, 그리고 신라지역으로 소백산맥을 넘어 영일만지역가지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의 정세는 6세기 접어들면서 서서히 변화해 갔습니다 북위에 내분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북위는 동위(534년)와 서위(535년)로 분열되었습니다 다시 동위에 이어 북제(550년)가, 서위에 이어 북주(557년)가 각각 등장해 동서로 나뉘어 대립하였습니다 한편 남조에서도 송이 망하고 진왕조가 들어섰습니다(557년), 뿐만 아니라 몽고고원에서도 세력교체가 있었습니다 고구려 양원왕 8년(552년) 신흥 돌궐이 유연을 격파하고 북방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였습니다

이 당시 고구려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고구려 조정에서도 귀족 간의 내분이 심화되는 등의 불안이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안원왕 원년(531년)에 일어난 안장왕의 피살도 이와 연관된 것입니다 또한 안원왕 14년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귀족 간의 분쟁이 일어나 세군측이 추군측의 2000여 명을 살해하였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참조해 본다면 당시 고구려의 내분이 심각한 상태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고구려는 남쪽에서 내분을 알아챈 나제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한강유역을 상실하는 등 수세에 몰려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중국의 정세변화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던 고구려에 그 파장이 밀려왔습니다 고구려 양원왕 8년 북제의 문선제가 친히 요서지방에 행차하여 고구려를 위협해서 북위 말기에 고구려로 도망해 온 유민 5000여 호를 쇄환(빗자루로 쓸듯이 모두 데려온다는 의미)해 갔습니다 이와 같은 위협에 직면한 고구려는 남조의 진과 외교 교섭을 통하여 북제를 견제하였습니다

북제의 군사적인 위협에도 불구하고 남북조의 북제, 북주, 북진의 세력균형이라는 구제정세와 맞물려 고구려와 북제 사이에는 평온이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한편 돌궐이 흥안령산맥을 넘어 거란족과 말갈족에 세력을 뻗쳐왔고 나아가 고구려의 국경을 침범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고구려는 거란족과 말갈족에 대한 지배권을 한층 강화하며 돌궐의 진출을 적극 저지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돌궐과의 충돌이 벌어져 당시까지 평화를 유지해 왔던 몽고고원 유목민 국가와의 평화가 깨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고구려를 견제하고 압박해 왔습니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6세기 중반 이후 남북 양쪽에서 밀려오는 압박에 의해 5세기 이후 구축해 놓았던 동북아의 한 축으로서의 중심적 역할과 그 세력원이 점차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6세기 후반에 중국지 수제국으로 통일되면서 고구려는 새로운 선택과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반응형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반도 역사의 고구려 4부  (1) 2024.02.06
고려 거란 전쟁 김은부  (3) 2024.01.14
한반도 역사의 고구려 1부  (0) 2023.12.26
한반도 고대 국가 삼한(마한 변한 진한)  (2) 2023.12.21
한반도 고대 국가 옥저  (0) 2023.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