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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려 거란 전쟁 김은부

by 아몽지크 2024.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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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거란 전쟁 김은부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요즘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 김은부가 등장하여 현종 강감찬 등 여려 갈등은 일으키고 있는데 실제 김은부가 역사에서 어떤 기록을 남겼는지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김은부는 누구인가?

김은부는 제2차 고려 거란 전쟁 시 공주 절도사로 고려 현종이 거란군을 피해 몽진할 때 현종을 푸대접하거나 공격한 다른 지방의 호족들이나 지방관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현종을 극진히 대접하고 도움을 준 절도사로 훗날 고려의 중신이 되어 출세가도를 이룬 인물입니다

 

김은부 생애와 경력

김은부는 출생은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으며 사망한 시기는 1017년 6월 17일로 본관은 안산 김씨(김알지 계열)입니다

김은부는 수주(수원시) 안산현(현재 경기도 안산시) 사람으로 성품이 근검하고 강직한 인물이었습니다 고려 성종 때 견관승(종 6품~9품), 고려 목종 때 여러 차례 전임하여 어주사가 되었고, 고려 현종 초에 고려 12목 중 공주목의 절도사가 되어 안절군을 담당했습니다

김은부의 인생 전환점은 고려 거란 전쟁 시 인생의 기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제2차 고려 거란 전쟁 시 거란이 개경까지 점령하자 고려 현종이 거란군을 피해 남쪽으로 몽진을 하다가 공주에 머물게 되었는데, 당시 공주 절도사 김은부는 성심을 다한 예를 갖추어 고려 현종을 맞이했습니다

당시 고려사 김은부 열전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김은부는 "성상께서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온갖 고생을 겪으시며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실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라고 한 대목이 있습니다

이는 역사적 기록으로 고려 현종이 몽진 시 엄청난 고생을 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김은부는 고려 현종이 공주까지 고생하며 당도하게 된 점을 극진히 위로하고 의대와 토산물을 바쳤다고 합니다 현종은 옷을 갈아입고 당시 현종을 호위하며 따라온 관리들에게 김은부로부터 받은 토산물을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고려 현종이 날이 저물어 파산역(논산)에 이르렀을 때 당시 역리들이 모두 도망가고 남겨진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음에도 김은부가 본인의 식량을 나눠 차려 아침저녁으로 지극 정성껏 받들었다고 합니다

이후 고려와 거란군의 교섭으로 거란군이 퇴각한 후, 고려 현종은 개경으로 상경 길에 다시 공주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 김은부는 맏딸을 시켜서 어의를 지어 올리게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현종은 그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는데, 그녀가 바로 현종의 아들이자 고려의 9대 왕 덕종과 10대 왕 정종의 어머니인 원성왕후입니다

이후 왕비 원성왕후의 두 여동생 원혜왕후, 원평왕후도 맞이하게 되는데, 김은부는 세명의 딸을 왕후로 만들고 외손자들을 왕으로 만든 인물이 되었습니다

김은부는 고려 현종이 원성왕후를 맞은 바로 그 해 제2차 고려 거란 전쟁 직후인 1011년에 형부시랑으로 임명된 것에 이어서 거란 성종의 생일을 축하하러 거란에 사신으로 방문하게 되는데, 귀국하던 도중에 거란에 의해 여진에게 포로로 사로잡혀서 몇 개월 동안 억류를 당하다가 겨우 귀환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하지만, 귀국한 후인 1015년에는 지중추원사로, 다음 해인 1016년에는 호부상서에 이어 중추사 상호군으로 임명되어 출세가도 달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다음 해인 1017년에 사망하는데 이때 고려 현종이 원성왕후의 부친이라 하여 부인과 부모, 그리고 장인인 이허겸과 더불어 추증되고 식음도 하사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현종은 왜 김은부의 세 딸을 후비로 맞이했을까?

거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고 판단되는데 이에는 다음 기록이 참고됩니다 [김은부는 수주 안산현 사람이니 성품이 부지런하고 검박했다 성종 때에 견관승으로 임명됐다가 목종 때에 어주사가 됐고 현종 초년에 공주절도사가 됐었다 왕이 거란군의 침공으로 인해 남쪽으로 피난 가던 도중, 공주에서 머물렀더니 김은부가 예의를 갖추고 교외까지 마중 나와 말하기를, “성상께서 험한 산천을 지나시며 찬서리 눈바람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오실 줄이야 어찌 뜻하였으리까?”라는 위로의 인사를 드리고 옷과 허리띠, 지방 특산물을 바쳤다  왕이 드디어 옷을 갈아입고 호종 관리들에게 물건을 나눠줬다 왕이 파산역에 이르니 역의 아전들이 모두 도망가고 식사조차 드리지 못하게 됐는데 김은부가 또 반찬을 장만해 조석으로 왕에게 식사를 바쳤다 그 후 거란군이 철퇴하고 왕이 국도로 돌아오는 길에 또다시 공주에서 유숙했는데 김은부가 맏딸을 시켜 왕의 의복을 지어 바쳤다 이것이 인연이 돼 그의 딸이 궁으로 들어가게 됐으니 그가 바로 원성왕후이다 원혜, 원평 두 왕후도 역시 그의 딸이었다(‘고려사’권94 김은부전)]

[원성태후 김씨는 안산 사람이니 시중 김은부의 딸이다 덕종, 정종, 인평왕후, 경숙공주를 낳았다 처음에 현종이 남녘으로 피난 갔다가 거란 침략군이 퇴각한 후 돌아오는 도중에 공주에 이르렀을 때 김은부는 절도사로 있었다 김은부가 그의 딸을 시켜 왕의 의복을 지어 드리게 하였더니 이로 인해 그를 맞아들여 연경원주라고 불렀다 그가 현종 9년 7월에 정종을 낳으니 왕이 연경원을 연경궁으로 고치고 사절을 보내 예물을 줬다 현종 13년 9월에 김은부에게 ‘추충수절창국공신 개부의동삼사 수사공 상주국 안산군 개국 후 식읍일천호’를 줬으며 죽은 모친에게는 안산군 대부인을 추증했다 또 이내 후를 왕비로 책봉했다 정종 15년에는 또 조부 김긍필에게 ‘상서우복사 상주국 안산현개국후 식읍식읍일천오백호’를 추증했으며 죽은 조모에게 안산군 대부인을 추증했다 외조부 이허겸에게 ‘상서우복사 상주국 소성현개국후 식읍일천오백호’를 줬다 정종 18년 9월에 왕후가 살던 옛집의 택호를 장경궁이라고 했다 그가 정종 19년(1028) 7월에 죽으니 시호를 원성 왕후라고 했으며 명릉에 매장했고 현종의 사당에 합사 했다 덕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태후로 추존하고 후에 용의공혜라는 시호를 추가했다 문종 10년 10월에 영목이라는 시호를 주고 후에 또 양덕신절순성이라는 시호를 추가했다 인종 18년 4월에는 자성이라는 시호를, 고종 10년 10월에는 광선이라는 시호를 추가했다(‘고려사’권88 후비전1 현종 원성왕후 김씨조)]

 

현종 보살핀 대가로 딸 후비돼 이처럼 현종이 거란의 침략을 받아 남쪽으로 피난 갈 때와 돌아올 때 잘 보필한 대가로 그의 딸이 후비가 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종은 원래 목종의 옹립으로 왕이 됐다 할 수 있으나 그 과정에서 강조의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자 거란은 강조의 정변과 목종 시해의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로 침략을 해왔습니다

현종은 강조로 하여금 이를 막게 했으나 패하자 현종은 남쪽으로 피난을 가게 됐었습니다 현종이 피난 간 목적지는 전라도 나주였는데, 현종은 개경을 출발해 양주∼광주∼비뇌역∼사산현(충남 직산)∼삼례역(전북 삼례)∼장곡역∼인의역(전북 태인)∼수다역을 거쳐 노령을 넘어 나주로 들어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현종은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경기도 광주에 있을 때 강화를 청하러 간 사신 하공진 일행이 거란 병영에 구금됐다는 말을 듣고 시랑 충숙, 장연우, 채충순, 주저, 류종, 금응인 등을 제외한 여러 신하들이 놀라고 겁이 나서 왕을 버리고 뿔뿔이 도망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현종이 공주 웅진나루서 장곡역에 유숙할 때에는 전주절도사 조용겸 무리의 공격을 받기도 하는 등 고초를 겪으면서 현종이 공주에 도착했습니다

현종은 웅진 나루를 건너 공주로 들어왔습니다 당시 상황을 다음 자료에서도 엿볼 수 있다. 『웅진도는 주(州)의 서쪽 7리에 있으며 적등진의 하류이다 고려 현종이 거란을 피해 남쪽으로 달아나니 절도사 김은부 등이 이 나루에서 맞았다 현종이 시를 짓기를, “일찍이 남쪽 땅에 공주가 있다고 들었더니 선경(仙境)이 영롱하여 길이 있었구나 이러한 마음 즐거운 곳에 이르러, 군신(群臣)과 함께 모여 일천 시름 놓아본다”하였다 송사에 이르기를, “거란이 강조를 잡아 죽이니 왕순이 평주로 달아났다”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권17 충청도 공주목 산천조)]

김은부가 웅진 나루에서 현종을 맞이하자 현종은 시를 읊어 잠시 시름을 잊었던 것입니다 현종이 공주에 들어오자 김은부는 정성을 다해 새로운 옷과 허리띠, 그리고 지역 특산물을 바쳤습니다 파산역에 이르렀을 때도 고을 아전들이 다 도망해 식사를 하지 못하게 되자 김은부가 나서 식사 준비를 해 들게 했습니다

개경으로 돌아올 때에도 현종은 공주에 들렀습니다 나주를 출발한 현종은 복룡역∼고부군∼금구현∼전주∼여양현(충남 여산)을 거쳐 공주에 오게 되는데, 현종은 편안한 마음으로 공주에서 6일 동안이나 머물렀습니다

이때에 김은부가 그의 맏딸을 시켜 어의를 새로 지어 바쳤습니다 이후 현종은 청주를 거쳐 개경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현종은 김은부의 배려에 대한 보답으로 그 맏딸을 아내로 맞이했으니 그가 바로 원성왕후 김씨입니다

그 후 2명의 딸을 더 후비로 들였습니다 지방의 지배자 공주절도사 그렇다면 현종이 김은부의 세 딸을 후비로 맞은 것이 오로지 피난 시의 후의 때문이었을까? 여기서 당시 김은부의 직책이 공주절도사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원래 절도사는 중국에 있었던 관직명입니다 중국의 삼국시대에 오나라의 손권이 군량의 운반과 총괄을 담당하는 관으로서 설치한 것이 그 시초입니다 그 후 당 나라 예종 때인 685년 변경에 설치했으며 얼마 안가 전국의 도와 몇 개의 주에 이 관직을 설치했는데 일명 번진이라고도 했습니다

절도사는 그 휘하에 절도부사·행군사마·판관 등의 요속을 두고 관내의 군정과 민정을 총괄했습니다 그러나 송대에 이르러 허관이 됐고 원대에 폐지됐습니다 결국 당 나라 때의 절도사는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고 있어 지방의 실질적인 지배자였습니다

김은부는 성종 때에 견관승(종6품∼정9품)이라는 낮은 관직에 있었고 목종 때에는 어주사로 있었습니다 어주사라는 관직이 정확히 어떤 일을 관장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 명칭으로 보건대 왕이 드시는 음식을 관장한 직책으로 생각됩니다

왕의 측근에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때 그는 목종이 현종을 옹립할 때 일정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공으로 그는 공주절도사에 임명된 것으로 보입니다

공주절도사로 있을 때 현종을 도와준 대가로 그 딸이 후비가 돼 그도 출세가도를 달리게 됐습니다 개경으로 돌아온 직후 현종은 그를 중앙으로 불러 형부시랑(정 4품)에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11월 현종은 거란 임금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로 그를 거란에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도중 래원성에서 거란의 사주를 받은 여진에게 붙잡혀 갔다 몇 년 후에 돌아왔습니다

고려를 대표하는 사신이 됐으니 현종의 신임이 어떠했는가를 짐작케 해 줍니다 현종 6년 5월 김은부는 지중추사가 됐고 현종 7년에는 호부상서(정 3품)가 됐으며, 그해 6월에는 중추사(종 2품) 상호군이 됐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현종 8년(1017) 4월에 죽었습니다 김은부 가문의 영화는 당대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외손자가 계속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입니다 즉 김은부의 딸 원성태후 김씨와 현종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현종의 뒤를 이어 덕종과 정종이 됐습니다 또 원혜태후 김씨의 아들이 정종의 뒤를 이어 문종이 됐던 것입니다

그들은 또 근친혼을 통해 더욱 공고해진 세력을 과시했습니다 덕종은 제3 비로 효사왕후 김씨를 맞이했는데 그녀는 현종과 원혜왕후 김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는 배다른 남매간의 결혼이었습니다 문종은 또 제1비로 현종과 원성태후 김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인평왕후 김씨를 맞이했습니다 이 역시 이복 남매간의 결혼이었습니다 순종도 김은부의 후손과 결혼했습니다

김은부에게는 아들도 있었는데 큰 아들은 김충찬으로 중추사 병부상서를 지냈으며 작은 아들은 출가해 경덕국사가 됐습니다 외척 세력의 등장 결론적으로 현종은 13명의 후비를 맞이했습니다 이는 태조 왕건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후비 수입니다 이는 자신의 지지 세력이 미약하였던 현종이 외척으로 자신의 지지 세력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성종의 인척을 종실에서 3인이나 후비를 들이었으며 김은부의 딸 3인을 후비로 맞은 것도 독특합니다 이는 전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해 나주로 가고 올 때 김은부가 도와준 대가였습니다

또 공주절도사로 병권을 가지고 있었던 김은부의 군사력에 의지하고자 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현종은 개경으로 돌아온 후 김은부를 개경으로 불러들이고 절도사제는 폐지했습니다

개경에 올라온 김은부는 형부시랑으로 거란에 사신으로 갔다가 거란의 사주를 받은 여진에게 붙잡혀 몇 년간 고초를 겪기도 했으나 중추사(종2품)의 지위에까지 올랐습니다

김은부의 등장은 고려의 후삼국 통일이나 태조 왕건과는 관계가 없는 새로운 외척 세력의 등장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문종대에 와서는 김은부의 처가인 인주 이씨가 새롭게 등장합니다 김은부의 처남 이한의 아들 이자연이 문종에게 3인의 딸을 바침으로써 오히려 김은부 가문보다 더 위세를 떨치게 됐습니다 그런데 외척으로서 권세를 누릴 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김은부의 활약에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김은부의 활약과 그 대가로 세 딸이 현종비가 된 것은 안산 김씨 김은부 가문은 물론 인주 이씨가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됐던 것입니다

 

고려 거란 전쟁에서 수많은 영웅들이 탄생하고 역적도 탄생하고 알력다툼이 있었지만 당시 시대의 흐름을 잘 이용한 김은부라는 인물은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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