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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반도 역사의 고구려 4부

by 아몽지크 2024.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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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역사의 고구려 앞선 1, 2, 3부에 이어 고구려 후기에 한강유역을 상실한 것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합니다 고구려 후기의 당시 정세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상실한 원인을 살펴보겠습니다

 

고구려 한강유역을 상실하다

6세기 중반 551년 신라의 진흥왕과 백제이 성왕은 서로 손을 잡고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북진정책을 진행하였습니다

백제 성왕이 이끄는 백제 가야의 연합군은 한성을 공격하여 한강 하류의 6군을 차지하였습니다

이어 거칠부 등이 이끄는 신라군이 죽령을 넘어 고현(철령지역)까지 진출하여 한강 상류의 10군을 확보하였습니다

백제와 신라가 차지한 6군과 10군의 정확한 위치는 알수 없지만 6군은 대략 임진강 이남에서 수원, 여주 이북지역으로 추정하고 있고, 10군은 대략 충주, 제천에서 철원까지의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백제와 신라 연합군의 기습적인 공격에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한강유역을 빼앗긴 고구려는 이를 다시 탈환하기 위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기보다는 단지 양국 연합군의 북진을 한강유역 수준에서 저지하기 위한 미봉책을 세우기에 급급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을 반증하는 것 중 하나로 신라와 화평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고구려의 수습책은 단기적으로 일단 저물어가는 고구려가 조금 더 국가를 유지하기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고구려로부터 반격 위협이 사라지자 진흥왕 14년(553년)에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백제가 탈혼한 한강 하류지역을 기습 공격하여 이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에 격분한 백제는 전열을 정비하여 이듬해에 관산성(옥천)에서 신라와 격전을 벌였으나 성왕이 전사하는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게 됩니다

이전투로 신라와 백제동맹은 완전히 깨지고 오히려 이후 백제와 신라간의 격돌이 치열하게 전개가 되었습니다

한강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나제동맹의 결렬로 인하여 백제의 군사적 위협이 증대되었기 때문에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구려는 비록 한강유역을 잃기는 했지만, 남쪽으로부터 군사적 위협에서 벗어나 일단 한숨을 돌릴 수 있었지만, 한강이라는 한반도 요충지를 상실하면서 고구려 멸망의 씨앗을 뿌려두고 키우기 시작된 시기라고 판단됩니다

고구려가 남진의 거점이며 한반도 중부의 전략적 요충지인 한강유역을 상실하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는지 대내적, 대외적 배경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대내적인 요인은 왕권의 약화와 귀족세력간의 분열 등으로 인한 정국의 불안정을 들 수 있습니다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본기에 의하면 고구려 안장왕과 안원왕은 정치적 변란에 의하여 희생되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안장왕이 살해된 동기는 알 수 없으나 안원왕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쟁의 와중에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안원왕은 세 부인이 있었는데, 대부인은 아들이 없고 중부인과 소부인의 소생이 있었다고 합니다 중부인측은 추군, 소부인 측은 세군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재위 15년(545년)에 안원왕이 병이 들자 후계를 노린 외척 추군과 세군 사이에 군사를 동원하여 3일간 걸친 격렬한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 안원왕은 죽었고 분쟁은 추군측의 승리로 끝나 중부인의 소생인 양원왕이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됩니다

이때 패배한 세군측의 희생자가 2천여 명이 넘었다고 하는데 당시 왕위계승전에는 외철만이 아니라 상당수의 중앙귀족이 참가하였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러한 대규모 정쟁의 발발은 당시 고구려 내부 귀족세력 간의 분열과 갈등이 상당히 심각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왕위 계승전을 통해서 드러난 고구려 귀족세력 간의 갈등은 양원왕대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양원왕 13년 (557년)에는 환도성의 간주리가 반란을 꾀하였다가 토벌되었다고 합니다 

중앙정계에서의 정변의 여파는 지방에까지 심각한 파급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삼국사기 거치부전에 의하면 양원왕 7년(신라 진흥왕 12년)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한강유역을 공격할 때 고구려의 혜량법사가 문도를 이끌고 신라군 장수 거칠부를 맞이하여 "지금 우리나라의 정국이 혼란하여 멸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라고 하면서 신라로 망명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혜량법사의 동향으로 볼 때 한강유역의 상실에는 중앙에서의 정국의 혼란 이외에도 중앙정권에 불만을 품고 있거나 위기의식을 느낀 지방세력의 이탈도 하나의 원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상실한 대외적 요인으로 6세기에 들어 동아시아의 구제질서가 서서히 변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534년에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어 이후 각각 북제와 북조를 세웠습니다(550년, 557년) 고구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던 북위의 붕괴로 인하여 그 전과는 다른 대외적 상황이 생겨날 가능성이 높아졌었다고 판단됩니다

더욱이 북방에서도 고구려 양원왕 8년(552년)에 신흥 돌궐이 유연을 격파하고 몽고고원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하는 세력교체가 일어났습니다 돌궐은 본래 흉노족의 일부로 알타이산 남쪽에서 유목생활을 하면서 유연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6세기 중엽 이후 점차 강성해지면서 유연을 대파하고 돌궐국을 건설하였던 것입니다

이후 돌궐국은 끈임없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동쪽으로 밀려왔습니다 이에 따라 돌궐에 의해 격파된 유연의 남은 무리들이 이동하여 요하 상류지역의 거란족을 압박하면서 이 일대에 연쇄적인 세력 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북제의 군사행동도 뒤따랐습니다

고구려 양원왕 8년에 북제는고막해에 대한 정벌 끝에 문선제가 영주에 머물며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북위 말기의 혼란기에 고구려로 이주한 유민 5천 호를 데려갔다고 합니다

이듬해 거란족의 일부가 북제의 북경을 침략하자 북제의 문선제는 거란족에 대한 대규모 친정을 감행하면서 요서의 창려성까지 직접 순행하였다고 합니다

이 같은 북제 문선제 행동은 고구려 내분에 이어 신라와 백제의 공격을 받고 있던 상황을 이용한 무력시위였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북제의 이러한 행동에 외교적, 군사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여 북제의 무뢰함을 제지하기에는 국력이 분열된 상황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강유역을 빼앗긴 이듬해부터 시작된 고구려 서북지역에서의 정세변동에 따라 고구려는 한강 유역으로 군사적 힘을 돌릴 여유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결국 고구려가 일단 신라와 화평을 맺고 한강유역을 포기한 데에는 6세기 고구려 내부적으로 왕권다툼, 귀족세력간의 분열, 중앙과 지방의 분열, 외부적으로 서북지역에서의 정세변동과 위협이 주된 배경이 되었을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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